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7세 (문단 편집) === 3월 혁명 === [[1076년]]이 되자 유통 경제가 전란으로 마비되면서 곡물 공급에 많은 애로사항이 닥쳐왔고, 니키포로스는 식량 공급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점점 위축되는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또다른 세원을 궁리했다. [[1077년]]에 그 결과로 공영 식량 창고(Phoundax)라는 시설이 도입되었다. 모든 식량 판매자들은 이 국영 시장에 식량을 판매하고 수수료를 지불했으며, 구입자들은 시장에서 수수료가 포함된 값으로 식량을 구입해야 했다. 여기에 대상인들이 끼어들어 가격 장난질을 시작하자 [[인플레이션|1077년도의 공식 식량 가격이 1075년~ 1076년 대비 거의 50배 수준으로 폭등했다]]. 1077년에는 소아시아 아나톨리콘 관구의 절도사인 [[니키포로스 3세|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]]가 3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고 동시에 [[디라키움|디라히온]]의 절도사인 [[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#s-2]]가 반란을 일으켰다. 어찌어찌 중앙 정부는 [[트라키아|수도와 그 인근]]을 건사하였으며 육군과 해군 병력도 있었으나 동서 양쪽의 반란으로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황에 처했다. 이제 수도의 시민 대중도 더 이상 묵과하지 않을 태세였다. 1078년 1월 6일. [[성 소피아 성당]]의 성탄절 행사 도중 사제단이 [[니키포로스 3세|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]]를 황제로 선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정부는 즉각 이를 진압하여 사제단을 체포하여 [[세계 총대주교]] 코스마스 1세(1075년 ~ 1082년)와의 깊은 갈등의 골까지 생겨났다. 3월 1일에 이르러 보타니아티스가 수도 건너편 해안가에 도착하여 봉화로 도착을 알리자 수도 시내는 흥분에 휩싸였다. 결국 3월 24일, 시민군이 조직되어 황궁을 점령하였으며 치안을 유지함은 물론 함대까지 접수한 뒤 보타니아티스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수도를 정돈했다. 시민군에 체포되어 성 소피아 성당에 연금된 미하일 7세는 결국 스스로 정권을 포기하고 [[수도자]]가 되어 정치에서 물러났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